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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이슈

개구리소년실종사건 범인

개구리소년실종사건 범인



1991년 경상남도에 사는 초등학생 5명이 개구리 알을 줍고싶다며 밖으로 외출을 나갔다가 집을 나섰다가 행방불명이 된 후 11년6개월 이라는 긴 시간이 흐른뒤에 2002년 9월26일 백골로 발견된 사건입니다. 



화성 아녀자 연쇄 살인사건(1986년~1991년), 이형후군 유괴 살인사고(1991년)과 함께 3대 미제사고라고 불립니다. 개구리 알을 주우러 가고싶다는 언행이 개구리 잡으러 간다고 전파되어서 초기에 많이 퍼뜨리게되면서 '개구리소년 실종 사건'이라고 명명되었습니다 당시 최고 집권자인 노태우(盧太宇) 전전 대통령은 강력한 지시를 내려 대구지시경찰청 과장을 본부장으로 수사본부장을 만들어서 와룡산뿐만아니라 인근 산들을 모두 포함해 전국을 스색하도록 했다. 전국 새마을중엉회 등 각종 사회집단에서는 700여만장의0 전단들을 전세계에 뿌렸습니다. 



한국담배인삼공사와 기업체에들도 담뱃갑과 상품들에 실종 어린이돌들 사진을 인쇄해 배푸하는 등 수색 작압에 동참했다. 대통령에 특별지세, 현상금 4200만억,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큰 집단인 연인원 35만명의 수사인략이 투입됐음에두 개구리소년들에 행방은 묘연해써요.



1991년 3월26일 대구 성서초딩교 6학년이었던 우철원(해당 사건에 13살)사람을 비롯해 조호얀(당시 12살), 김영교(당시 11살), 박천인(당시 10살), 김중식(당시 9살) 등 다섯 어린애가 집 뒤편인 달사구 이곡동 와룡산맥에 개구리 알을 줍고싶다며 간다며 집을 나갔는데요. 



해당 날자는 5.16 군사반란 이후 중지되었던 지방자치제가 30년이란 긴세월 이후에 다시제개되 시·군·구 기초대표자를 뽑는 선거 지정일로 임시로 쉬는날 이었는데요. 휴일 5명의 아이들이 와룡산맥에 등산하기 전 인근 마을에 서는 학교 친구와 촌 주민들에게 보여진 것이 그들의 최후의 모습이었습니다.



아이들이 행방불명되자 부모들은 걍 일들을 싹다 포기해버리고 그 외적인 것들도

 포기한 채 전국을 이李잡듯이 뒤졌는데요. 이후 개구리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노래가 만들어지고 공개되기도 했고요, 전국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대구 개구리친구 찾아버리기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는 등 이 사건은 전국적인 사고로 떠올랐습니다



이후 개많은 거짓 제보와 어이없는 예언들이 계속해서 발생했는데요. 사건이 장기화되어버리자 '짱깨 납치설', '북한 빨갱이 유괴설', '불치병 치료용 실험대상설' 등 온갖 낭설들이 나돌기도 했습니다. 1992년 8월 경찰에서는 한센병 환자들이 질병을 고치기 위해성 아이들을 유괴해성 죽였다는 소문을 믿고성 한센병 환자 정착촌들을 강제적으로 수사해 환센병 환자들의 거센 반발을 받아내기도했습니다. 



또 실종 된 후인5년째인 1976년 2월, 다섯 어린이 중 종식군의 부친이 아이들이 본인의 집에 매장해버렸다는 엉터리 범죄 심리자(전 카이스트 생물심리학 교수 김아무개씨)의 제안이 제기돼 굴삭기와 각종 삽 등으로 집안 변소와 부엌 전체를 해집는 소동이 벌어졌었지만 아무 흔적도 발생되지는 않았다. 자식을 잃은데다 누명까지 결국 쓴 종식군의 아버지는 눈물과 후회로 세상을 보내다 2001년 간암으로 목숨을 마쳤는데요. 종식군의 아버지께서는 세상을 떠버리기 전(全) “이승에서 못다한 부모님의 도리를 지옥에서 마치겠다. 먼저 내 아를 만나러 가겠다”는 유언을 남긴적도 있습니다